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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20 16:23
퇴계 이황의 생애
 글쓴이 : 영남퇴계학…
조회 : 787  
출생과 가정 환경 
퇴계 이황은 1501년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과 부인 문소김씨(2남 1녀) 춘천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르다는 뜻),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이황이 태어날 때 이황의 부모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의 꿈에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일컬었다.[1]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형은 온계(溫溪) 이해(李瀣)로 이해 역시 학자였으나 을사사화로 희생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일찍이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에 상처하고, 재혼한 안동 권씨 역시 46세에 사망하였으며 둘째 아들과 증손의 요절을 보았다.

수학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생활하였다. 8세 때 중형(仲兄) 이징(李澄)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다른 형제들 중 그만 이를 보고 통곡을 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손을 베인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어째서 우느냐고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친히 조카 퇴계를 비롯한 동리 청년들을 가르쳤다.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여, 도연명과 주자를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숙부 이우에게 수학한 뒤 향리의 용수사에서 공부하였고, 20세 무렵부터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독서를 하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병을 얻었는데, 이후부터 그는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1528년(중종 23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정치 활동과 학문 연구 
 을사사화, 소수서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28년(중종 2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33년 다시 성균관에 입학하여 하서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유하였고,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또한 노수신과도 만나 친분을 쌓았는데, 이황은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노수신은 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李延慶)의 문인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조광조의 영향을 받게 된다. 1533년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중종 28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동년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金麟厚)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1540년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1543년 10월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성묘를 핑계삼아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 6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해 10월 이기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는 탄핵을 당하고 파직당하였다.

1545년 10월말 이기 (1476년; 李芑)가 다시 그에게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된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 1546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월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당하였으나,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하였다. 그해 8월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거쳐 1547년 7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부임했다가 1개월 만에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지방관 생활과 낙향 
그해 12월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을 거쳐 이듬해 단양군수로 나갔다. 거기서 기녀인 두향을 만났다.

1548년(명종 3년) 1월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했다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그의 형 이해가 충청감사가 되어 발령하자, 전출을 자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형 이해(李瀣)가 탄핵을 당해서 갑산으로 유배 가던 중 양주에서 병사했다. 이황은 형 이해의 일에 연좌되어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 '이부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풍기 군수 시절에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향약과 주자가례의 장려와 보급에 치중하였고, 퇴청 후에는 문하생을 교육하여 성리학자들을 양성했다.

서원 건립과 후학 양성 
풍기군수 재직 시절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는 서원을 근거지 삼아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의 소수서원 사액 실현은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52년(명종 7년) 다시 내직으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시독관(侍讀官)이 되었다. 이어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

임금이 힘써야 할 일은 경술(經術)을 택하고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공(覇功)을 억제하는 것일 뿐인데, 조금만 잡되어도 패도로 흐르게 됩니다. 지금은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려지기를 도모할 때여서 바야흐로 왕도가 행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佛敎)가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비록 왕도에 마음을 다하더라도 마침내는 불교에 빠지고 맙니다. 지금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기는 하나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도에는 미진한 점이 있는 듯싶습니다. 그 설(說)에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고 나라의 복을 연장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격치(格致)의 학문에 밝아 그 거짓됨을 환히 안다면 권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소지(小紙)를 꺼내어 어상(御床)에 놓으며 아뢰기를,

신이 1547년 에 소대(召對)하라는 명을 받고 입시하였을 적에 《논어(論語)》의 애공(哀公)이 사(社)에 대해 물은 장(章)의 전(傳)에 ‘재여(宰予)의 대답이 사(社)를 세운 본의(本意)가 아니다.’라는 데 이르러 상께서 하문하셨으나 신이 변변치 못하여 즉시 진달하지 못하였고, 그 뒤 외관(外官)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역시 아뢰지 못했습니다. 여기 이 소지에 쓴 것은 모두 사(社)를 세운 제도입니다. 제천(祭天)·교사(郊祀)는 우리 나라에서 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 예(禮)는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감히 써서 아룁니다.
그해 5월 사헌부집의, 6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7월 성균 대사성 지제교(成均大司成知製敎)를 거쳐 그해 11월 사직하였다. 1553년 행성균관사예를 거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7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조정 출사와 사퇴 
1553년 행상호군으로 빈전에서 서얼 방금법 허용 논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서얼 허통을 지지하였는데 그는 일부 서자들이 적장자를 무시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으나 서자라고 해도 실력이 있는 자는 채용해야 된다며 인재 채용시 귀천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2]

1554년 5월 형조참의에 임명되어 상경하였고, 6월 병조참의를 거쳐 그해 12월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5년 2월 다시 상호군에 임명되어 한성에 왔는데, 상경할 적에 가난하여 의복과 관대(冠帶)가 없으므로 판서 조사수(趙士秀)가 겉옷 1벌을 주었지만 사양하고 옷을 받지 않았다. 1555년 5월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56년 5월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해 8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8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고사하였고, 한직인 충무위상호군직에 임명되었다. 1559년 다시 공조참판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고, 여러번 그에게 올라올 것을 권고하여 그해 7월 상경하여 정사를 올려 사직하였다. 바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낙향하였다.

학문 연구와 사상적 완성 

퇴계 이황의 서한
그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사색, 후진 양성에 주로 치중하였다. 명종은 그를 존경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그는 조광조의 죽음을 봤고 왕의 출사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출사 요청을 계속 거절하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명종의 총애를 안 경상도관찰사 이감(李戡)은 수시로 그를 찾아 예를 표하고 우대하였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 《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생애 후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60년 고향 토계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으로 고쳤으며, 이후 7년간 주로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문하생들이 찾아와 이를 지도하였다. 1565년 4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반려하였다. 1566년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자 왕이 반려하였다. 이후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명종이 갑자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선왕의 행장을 짓는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질병으로 부득이 귀향하게 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후 선조가 여러번 부를 때마다 시정의 폐단을 간하는 사퇴 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가 거듭된 부탁으로 출사,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왕에게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히게 한다. 또한 그는 아녀자들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언문으로 번역한 것을 인쇄, 간행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에 그는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던 퇴계는 제자들과 토론하기를 즐겼으며, 성리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568년 1월 행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하였고, 그해 7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문하생 선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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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문하생을 받아들일 때 사람됨됨이를 먼저 알아보고자 여러가지 시험 방법을 썼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는 한여름 삼복더위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게 한 다음 이것저것 문답을 하였다. 이때 이황은 시원하고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제자 되기를 자청한 사람만 잔뜩 차려입고 더위를 참아가며 그와 대화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때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참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이황은 중간에 옷을 벗어버리는 사람을 제자로 맞아들이고, 끝까지 참아내는 사람은 사람됨됨이가 모질고 비인간적이라고 하여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념은 높이 샀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인한 성격을 가진 자가 나중에 높은 벼슬이라도 하게 된다면, 보나마나 자기만의 그릇된 신념으로 백성들을 고달프게 만들 것이라는 점이 이황의 지론이었다. 그는 학문 연구를 일생 최대의 과업으로 여겼지만 자신의 자제나 문하생들에게는 자신의 뜻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 일화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죽음 
1569년(선조 3년) 이조판서가 되어 상경하였으나 여러번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사직소가 수리되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다. 만년에 병을 핑계로 낙향, 1570년 음력 12월 8일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향년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사후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지 말고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우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산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이 하나 세워졌다.

사후 
그 뒤 문순공의 시호를 내리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사를 추증하였으며, 1610년 문묘(文廟)에 모셨다. 광해군 때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학문상으로는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이었다. 동서 분당의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성암 김효원(金孝元), 그리고 한강 정구 등은 이황과 조식 둘에게서 배웠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유성룡과 김성일이며 많은 다른 제자들이 있었다. 한강 정구는·미수 허목에게 이어지며, 허목은·성호 이익 등 남인 실학자로 이어진다. 또한 여헌 장현광 등은 이황과 이이 학설의 절충을 한다. 이황은 영남학파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당색으로는 동인과 남인이었다. 이황 자신은 동서 분당 전에 죽었기 때문에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

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주관되었다가, 노론 집권 후 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행차하면서 부활하였다.[3] 1968년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권 지폐의 도완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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